억만무림
- 블랙툰

- 8월 29일
- 3분 분량
처음 《억만무림》의 설정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꽤 단순했습니다.
“공룡이 무공을 쓴다고?”
6600만 년 전, 공룡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무림이 존재한다는 설정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트리케라톱스가 무공을 펼치고, 티라노사우루스가 무림의 조직에 몸담으며, 익룡이 검객처럼 등장합니다.
설정만 놓고 보면 처음에는 패러디나 개그물에 가까운 작품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의외로 이 작품, 무협에 꽤 진심입니다.
황당한 설정인데 무협의 기본은 제대로 갖췄다
주인공 벽뢰아는 트리케라톱스입니다.
스승을 잃은 뒤 강호로 나서고, 자신이 배운 무공의 비밀과 스승인 천마의 과거를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무협 성장물의 구조입니다.
스승에게 무공을 배우고, 강호에 나와 여러 인물을 만나며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거대한 비밀과 마주하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그 모든 역할을 사람이 아니라 공룡들이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화 보다 보면 공룡이라는 사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룡의 신체적인 특징을 무공에 활용하는 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특히 네 발로 걷는 트리케라톱스인 벽뢰아가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겪다가, 자신의 뿔 자체가 검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 같은 부분은 이 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단순히 사람 대신 공룡 캐릭터를 그려놓은 것이 아니라 공룡이라는 설정 자체를 무협의 무공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벽뢰아라는 주인공도 은근히 매력적이다
벽뢰아는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주인공은 아닙니다.
산에서 수련만 하다 내려왔기 때문에 강호의 사정에도 어둡고, 사람을 쉽게 구분하거나 세력 간의 복잡한 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대신 무림에 대한 낭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어느 문파인지, 어떤 출신인지부터 따지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상대를 바라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이 좋았습니다.
요즘 성장형 주인공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상황 판단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식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많은데 벽뢰아는 조금 다릅니다.
어리숙한 부분은 있지만 답답하다기보다는 아직 강호에 물들지 않은 소년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가치관이 어떻게 변할지도 궁금해집니다.
역시 가장 궁금한 인물은 천마다
작품에서 가장 큰 떡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아무래도 벽뢰아의 스승인 천마입니다.
무림에서는 천마를 무공의 정점에 섰던 존재이자 무림을 멸망시키려 했던 공포의 대상으로 기억합니다.
7대 문파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겨우 막아냈지만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천마가 벽뢰아에게는 '스승님'입니다.
이 차이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벽뢰아가 기억하는 천마와 세상이 기억하는 천마가 과연 같은 존재인지, 정말 무림을 멸망시키려 했던 인물인지, 아니면 당시 사건에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 있는지가 이야기의 중요한 축으로 보입니다.
특히 천마를 알고 있던 거거거사를 통해 과거 이야기가 조금씩 드러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단순히 악역이었던 스승의 비밀을 밝히는 이야기라기보다, 한 인물을 바라보는 역사와 개인의 기억 중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따라가는 느낌도 있습니다.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다
《억만무림》은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꽤 강렬합니다.
벽뢰아의 사저인 운화령은 겉으로 보면 든든한 선배 같지만, 벽뢰아의 물건으로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그를 좋아합니다.
심지어 위험한 무림에서 벽뢰아를 지키기 위해 아예 무공을 폐하고 자신이 돌봐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집착하는 인물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벽뢰아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한 단계 성장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결국 벽뢰아가 제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인물이라는 것도 느껴집니다.
여기에 티라노사우루스인 위미소가 메이드 카페에서 일한다거나, 육나한이 여섯 마리의 공룡으로 나한진을 펼치며 합체한다거나 하는 설정도 등장합니다.
정색하고 보면 상당히 황당한데 작품 안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이게 《억만무림》 특유의 재미인 것 같습니다.
웃기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이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분위기의 차이입니다.
메이드 카페가 나오고, 유명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패러디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이름이나 연출에도 장난스러운 요소가 꽤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이야기는 꽤 무겁습니다.
위승의 과거만 봐도 그렇습니다.
양부모에게 거둬져 살아가다가 녹림의 습격으로 가족과 동료들을 잃고, 죽어가는 양아버지에게마저 역귀 취급을 받습니다.
이후에도 자신의 불운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까 두려워하고, 결국 목숨을 걸어 어린 위미소를 구한 뒤 양녀로 삼습니다.
공룡 무협이라는 독특한 외형 아래에 이런 정통 무협식 비극이 제법 진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가볍게 웃기기만 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개그와 패러디로 경계를 풀어놓은 다음 예상보다 무거운 이야기를 툭 던지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패러디를 아는 사람이라면 찾는 재미도 있다
작품 곳곳에는 다른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붉은 삼연성부터 이름만 들어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고, 귀리평이나 노반처럼 특정 작품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인물도 있습니다.
이런 요소를 전부 알아야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면 그냥 독특한 캐릭터로 넘어갈 수 있고, 알고 있다면 '여기서 이걸 가져왔구나' 하는 재미가 추가되는 정도입니다.
이 정도 선이라면 패러디가 이야기 자체를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오히려 무협, 공룡,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패러디까지 여러 장르가 뒤섞인 것이 이 작품의 정체성에 가깝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다는 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문파와 조직도 계속 등장하고, 인물들의 이름도 전형적인 무협식 이름이 많다 보니 한꺼번에 읽으면 누가 어느 세력 사람이었는지 헷갈릴 때가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무협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방주, 행수, 표국, 무림맹 같은 용어나 세력 관계가 초반에는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또 패러디의 비중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유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작품의 첫인상이 지나치게 장난스럽게 느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대로 초반의 황당한 설정만 보고 단순 개그물이라고 생각하고 넘긴다면 조금 아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무협을 좋아하면서 조금 색다른 작품을 찾고 있거나, 진지한 이야기 속에 적당히 엉뚱한 유머가 섞인 작품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관심을 가져볼 만한 웹툰입니다.
한줄평 : 공룡 무협이라는 황당한 출발점에서 시작하지만, 보다 보면 천마의 비밀이 더 궁금해지는 묘한 작품.



